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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토기의 발달 By 관리자 / 2018-07-04 PM 07:51 / 조회 : 3194회

우리나라 토기의 발달

 
-신석기시대의 토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며 지금으로부터 약 10,000년 전부터 만들어 졌는데 현재 제주 고산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저장용 (storage), 가공용(preparing), 개인용(serving)의 셋으로 나뉜다.밑의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다.
가공용으로는 뾰족(둥근)밑의 빗살무늬토기가 역시 끓여먹는데(煮불) 쓰인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용의 그릇은 크기가 작은 것으로 구별된다. 일반으로 뾰족밑의 토기들 보다 납작밑의 토기들이 대개 크기가 작다.
물론 신석기유적에서 곡물보다 더 자주 출토되는 것은 탄화된 도토리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찾아진 신석기시대의 곡물 자료는 황해도 지탑리의 피나 조, 이웃 마산리 유적의 좁쌀, 평양시 남경유적의 좁쌀, 경기도 일산지역의 볍씨, 대천 옥천리 유적의 오곡(벼 , 조 , 기장 , 수수 , 보리 , 밀 , 콩), 부산 동삼동 유적의 조와 기장, 진주 상촌리의 조 등이 나와 있어 자료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며 다양한 곡물이 출토됨을 볼 수 있다.
이들 곡물을 가지고 가루로 만들고 찌는 등의 가공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발효작용에 대해 터득 해나갔을 것이다. 또한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은 바닷가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데, 신선한 어패류는 그 자체로 염분을 많이 함유하여 짜므로 이들을 토기에 담아두는 동안 발효 및 젓갈류에 대해 알게되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에 토기를 이용한 발효음식 만들기는 거의 모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청동기시대의 토기
산화분위기에서 토기를 굽던 가마의 존재도 예상되는데, 일반으로 이 시기의 무문토기들은 완전히 산화된 고운 적색을 띄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들에 넣던 다양한 비짐은 모래 위주로 종류가 단일해져, 이 역시 토기 제작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
붉은간토기 . 검은간토기 . 굽접시 . 옹관 등 토기가 특수용기로 많이 쓰이며 제의적 성격이 강해 지는 것은 사회의 발달 및 농경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철기시대의 토기
기원전 300년 무렵 철기시대가 되면 토기의 종류와 제작수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토기의 종류로는 우선 경질무문토기라고 불리우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보다 훨씬 단단하며 다소 두터운 거무스름한 토기가 주류를 이루게되었다. 경질무문토기는 화분모양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 무렵부터 토기의 뚜껑도 만들어졌다. 여기에 비짐은 각지고(angular) 굵은 모래 한가지로 단일화되었다.
그러나 철기시대에도 여전히 산화가마에서 구워진 토기들이 있다. 시루의 출현은 각종 음식물을 찌는(蒸) 과정이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쪄서 발효시키는 식품의 발달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종류나 쓰임새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나왔다고 여겨진다.
-삼국시대의 토기
삼국시대의 토기는 고구려토기, 백제토기, 신라가야토기로 대별된다.
고구려 토기는 시기에 따라 그릇의 제작수법과 생김새의 차이가 나지만 전 시기를 통괄해서 나타 나는 일반적인 특징들이 있다.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바탕흙이 고운 니질(silty clay)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전기(AD 300년 이전)에는 바탕흙에 굵은 모래가 섞인 것이 많으나 중기(300-500 AD) 이후 완전히 니질로 바뀌는 것이다. 이들 토기는 매우 질기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색깔은 황갈색이 주류를 이루나 점차 회색이 증가하며 중기 이후 회색 경질토기가 만들어졌다. 고구려 토기는 납작밑이 주를 이루며, 띠모양의 넙적한 손잡이가 네귀에 붙어있는 모습도 이들 토기만의 특징이다.
중기부터 물레를 사용한다. 일부 토기에는 겉면을 갈아서 윤을 내거나(磨硏), 유약을 입힌 녹갈색 도기(陶器)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고구려 토기에 무늬를 베푸는 일은 적으나 중기부터 눌르거나 새기는 수법으로 토기의 어깨 부분에 약간씩 시문(施文)하였다. 토기가 가장 발달한 중기 무렵에는 전기부터 사용되던 동이류나 접시, 대접 등의 출토례가 증가하며 이에더해 큰 독의 뚜껑으로 쓴 반(盤)형 뚜껑과 원통형의 세발토기(三足器)를 덮는데 쓰인 보주(寶珠)형 꼭지달린 뚜껑도 만들어진다.
토기의 기종은 껴묻거리나 의기용으로 사용되는 종류와 저장, 조리, 운반, 배식용 등의 생활용기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부엌 장면에 떡시루와 물동이가 놓여있는 모습을 보면 당시의 실생활을 짐작할 수 있을뿐더러 최근까지 민가에서 사용되던 것과 같은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김새의 전통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이어져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생활용기들은 고구려 토기의 생김새를 많이 전승하고있다.
백제토기도 시기에 따라 다양한 변천을 이루었는데, 한성에 서울을 두던 한성기(漢城期)와 수도를 천도한 뒤의 웅진-사비기로 나눌 수 있다. 한성기의 특징적인 토기 가운데 세발토기가 가장 유명하며 흑도 계통의 입곧은 항아리(直口壺), 그리고 굽다리접시(高杯), 합(盒), 뚜껑류, 원통형 그릇받침 등이 대표적이다. 몽촌토성에서 나온 세발그릇 가운데 폭이 넓은 대접모양의 토기는 제사지낼 때 제물 담는 그릇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역시 가장 일반적인 모습은 몸통부분에 승석문, 밑부분에 타날문이 있는 장란형(長卵形)토기이다.
웅진-사비기의 토기들은 한성백제 토기의 기종이 이어지는 가운데 장구를 반으로 갈라놓은 듯한 장식성 높은 그릇받침이 사용되며 세발토기는 다리가 매우 길어져 형식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 무렵 전후로 등장한 특징적인 뚜껑접시(蓋杯)는 곧 보편화되며 낮은 굽이 달린 크고 작은 완(항아리(四耳附長頸壺)나 유약바른 도기들이 있다. 한편 자배기류로는 흑색와질토기가 있는데 이는 탄소흡착방식으로 표면을 검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역시 회색연질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토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공장에서 대량생산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백제토기의 회색이나 회백색 등은 매우 부드러운 질감을 가지고 있어 고구려의 황색, 신라의 검정에 가까운 차가운 회색과 잘 대조된다.
백제 토기를 실제로 어떻게 구웠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충북 진천 삼룡리에서발굴된 가마터를 예로 들 수 있다. 큰 가마는 3-4세기의 것이며 길이 3.5m, 폭 1.8m 정도이다. 앞쪽이 아궁이로서 불탄 흔적과 재가 남아있고 토기는 안쪽, 구릉의 경사지에 놓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가마의 천장은 구릉 모양으로 흙이 덮여있었다고 여겨지므로 백제 토기의 가마는 구릉을 파고 들어간 모습임을 추정할 수 있다.
토기는 제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러번 언급하여 왔는바, 최근에는 토기를 가지고 제의를 직접 시행한 장소 즉 제사유적을 발굴한 바도 있다. 전북 부안 죽막동은 변산반도 끝자락에 있으며 서해 바다를 바라보는 곳이다. 이곳의 수성당이라는 제각 하부에서 제사용 항아리와 백제토기 등이 발굴 되었는데 아마도 항해의 안녕을 기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토기라는 물질에 담아 제사를 지내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도 이들만의 고유한 제작수법, 그릇 형태가 있어 고구려, 백제토기와 구별된다.
이들은 주로 영남지방의 철기시대 널무덤 계통에서 나오는 와질토기들로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나 4세기대에 들어서면 회청색 경질토기로 바뀌어간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처음에 작은 항아리와 같은 액체저장용 토기류에 국한되었고 여기에 타날문 등을 베푼 것들이었으나 점차 컵모양 토기처럼 새로운 기형이나 입큰잔처럼 마실 그릇, 목긴항아리 등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회색 연질이나 적갈색 연질로 만들어지던 화로모양 그릇받침(器臺), 원통형 그릇받침, 굽다리 접시 등도 회청색 경질토기로 바뀌었다. 다만 3세기 이후 만들어진 적갈색 연질의 납작밑 바리나 독 등은 회청색 경질로 바뀌지 않고 계속 같은 색상과 기형을 유지하는데, 이는 아마도 그릇의 기능과 관련될 것으로 여겨진다. 즉 생활용기로서 기능이나 형태가 한번 완성되면 지속적으로 쓰기 좋았던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는 이형(異形)토기들이 많고 실용적이기 보다는 주술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 다고 생각되는 토기들이 많다. 따라서 생활용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여기기 쉬우나 그럴 수 없는 일이며, 이는 그동안의 발굴이 고분군에 편중되어 부장품으로서의 토기들이 주로 발굴되었던 때문인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는 토기라기 보다는 도기(陶器)로 불러야 좋을 정도로 고온에서 구워 쇳소리가 난다. 석기(stoneware)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그릇들은 물레를 썼으나 대형토기는 물레로 빚기 어려 우므로 찰흙 띠나 찰흙판을 사용하였다. 밀폐된 환원가마를 사용하였으며 그 구조는 등요(登窯)라고 하여 요즈음의 가마와 같은 것이다. 가마를 잘 운영하여 산화분위기의 토기도 같이 구워내었는데, 먼저 가마를 개방하고 굽는 시간을 짧게하여 적색토기를 구워낸다. 소성의 마지막 단계에 가마의 입구와 굴뚝, 창 등을 모두 막아 환원상태에서 구워낸 것이 회색토기이다. 굽는 온도가 높다보니 자연유가 발생하여 유약을 바른듯한 효과가 나기도 한다.
고분의 껴묻거리로 쓰인 신라 가야토기는 약 20여종인데 주로 굽다리(高杯類)가 있거나 없는 접시, 뚜껑접시, 목긴항아리, 항아리, 손잡이바리 등이 많다. 이들은 회색 계통이며 적갈색 토기로는 바리, 뚜껑바리, 손잡이 독, 시루, 긴 독 등 생활유적에 많은 종류들이 나온다.5세기 초까지 완비된 신라, 가야토기는 장식성은 증가하나 소성기술은 점차 퇴보하게된다.
즉 고분에 다량으로 부장하기 위해 굽는 시간을 짧게 한 회색계 토기를 구워낸 것이다. 이 경우 토기의 질은 당연히 떨어지는 것이다. 또 굽다리 접시는 소형화된다. 6세기 무렵에는 무덤에 부장 되는 토기가 점차 감소된다. 6세기 말 이후 도장찍듯이 무늬를 찍어나간 인화문(印花文)토기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에 와서야 비로소 높은 온도에서 구워 이전의 회청색 경질토기처럼 단단한 성질을 회복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삼국시대의 토기들은 위에서 보았듯이 대부분 의기나 껴묻거리, 위신재 등으로서 비실용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았다. 즉 목이 길고, 굽이 높고, 그릇받침대가 있는 등은 실제 사용에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이런 편향성은 토기자료가 주로 고분발굴을 통해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나 어떻든 생활용기의 연구가 미진한 결과를 낳았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토기들은 매우 실용적인 생활용기로서 오늘날 사용하는 접시, 사발, 대접, 항아리, 병 등과 거의 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다. 목이 짧고 굽도 낮아서 쓰기에 불편하지 않다. 뚜껑있는 합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술병, 물병, 기름병 등 각종 병류가 다양해진 것도 특색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질그릇이 오랜 비실용의 세계에서 실용의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지적이 있다(윤용이, 1999 : 92).
통일기에는 녹유(綠釉)라고 하여 납성분이 든 유약을 쓰거나 갈색을 입히기도 하였으며 도장처럼 찍은 인화문토기가 크게 유행하였다. 인화문 단지는 뼈단지라고도 할 만큼 화장한 뒤의 뼈를 담는 경우가 많았다. 시신을 담는 일종의 관이다보니 매우 공들여서 장식한 인화문 토기들이 많다.
녹유토기에 인화문을 넣는 경우도 있다. 신라의 골품제도에 미루어볼 때 이런 단지는 진골 귀족 처럼 신분 높은 사람의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녹유단지를 다시 큰 절구처럼 생긴 돌 합 안에 넣은 경우도 나온다. 또 토기 전체를 돌아가며 세로 덧붙인 주름이 있는 주름무늬토기도 만들었다. 인화문토기와 주름무늬토기는 통일신라기의 2대 토기이다. 그러나 9세기에 들면 점차 인화문이 사라지고 무문의 토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고려,조선시대의 토기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12세기 초기까지의 토기는 통일신라 토기의 전통이 계승되어회청색 토기와 연질의 회흑색 토기들이 제작되었다. 이 무렵의 토기들 역시 높은 온도에서 구워 매우 단단하므로 도기(陶器)로 표현해야 더 적합할 것이다. 기종으로는 큰 항아리와 큰입 병 (廣口甁), 작은 병, 대발 등이 주류이며 접시나 완, 합 등은 청자로도 만들어졌다. 12세기가 되면 매병, 기름병, 주전자, 정병(淨甁) 등 청자의 모습을 본뜬 병(甁)류가 제작된다. 회청색 토기들과 연질 토기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13세기 중반부터 고려말까지의 토기들은 기벽이 두꺼워지고 승석문이 베풀어진 매병, 장군, 호, 술병 등이 많았다. 청자와 같은 형태의 병류는 상류층이 사용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토기들의 특징을 종합하면 병류, 그리고 항아리 종류가 가장 많이 만들어졌음을 꼽을 수 있다. 병류는 청자와 같은 형태가 많은데 매병이 대표적이다. 정병은 청자 및 청동그릇과 똑같은 생김새를 띄는데 불교의식에 사용되던 것이며 회백색의 연질이 많다. 큰 항아리는 높이가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큰 독은 쌀독이나 물독, 그리고 술독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독은 저장용인 것이다. 주전자는 참외 모양, 병 모양, 통모양 주전자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청동 그릇이나 청자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그밖에 큰 합과 뼈단지가 있다. 토기의 몸에는 전반적으로 물레 흔적이 뚜렷하며, 토기의 어깨 부분에 굵은 파상문을 새겨놓거나 톱니바퀴무늬를 찍어놓은 특징들이 있다.
조선시대의 토기들도 고려토기의 전통을 이어 경질과 연질토기로 대별된다. 이것은 토기의 기능과 쓰임새에서 볼 때 당연한 현상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토기가 매우 유용하다는 점을 정부에서 잘 인식하였고 경국대전에는 전국에 104명의 옹장(甕匠)이 있었으며 (윤용이, 1999 : 115). 후기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분원(分院)에 소속된 도공의 수만 380여명이었다 (박순발, 2000)고 할 정도이다. 16세기 중반까지 회청색 경질, 회흑색 연질토기들이 제작되었으며 분청이나 백자의 형태를 띈 매병, 병, 납작병, 장군, 단지, 큰 독 등이 만들어졌고 17세기에는 토기 들과 함께 제작된 막백자도 생활용기로 쓰였다.
17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진 유약입힌 옹기들의 모습은 오늘날도 지방에서 민수용으로 쓰이는 모습과 같다. 옹기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하여 식생활 용기 이외에도 등잔, 화로, 재떨이, 연적, 벼루 등의 소소한 생활용기와 장군, 물병, 단지 등의 생활용구, 향로, 옹관 등의 의례용구, 각종 약탕기, 술을 제조하는 소주고리, 북 등의 악기, 심지어 장군으로까지 사용되었다. 즉 찰흙으로 만든 생활, 의례 용기의 완성을 이룬 것이다. 대체로 조선 토기들은 삼국시대 이후 토기제작의 전통이 고려를 이어 지속적으로 계승, 완성되었으며 청자나 분청, 백자들과 같은 모습을 띈 것은 사용계층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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