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에 풀무원은‘매출 1조’에 달하는 위풍당당한 식품대기업이 되었지만 풀무원의 시작은 한국인의 풀뿌리음식이라 할 만한 콩나물과 두부사업이었다. 풀무원이 두부와 콩나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콩나물은 농약을 주어 길죽하고 통통하게 길러 팔던 때였고, 두부는 위생적인 문제가 야기되는 판두부 판매가 일반적이었다. 풀무원에서 물만 주어 기른 순수한 콩 나물이 백화점에서 판매되자‘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풀무원의 정신적 지주인 원경선 원장은 괴산에 있는 풀무원 농장에 거 주하고 있는데, 요즘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딸네 집(원혜덕:정농회 회장 부인)에 머무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한국콩연 구회 편집위원들이 방문하기로 한 날도 딸네 집을 방문했던 원경선원장이 돌아오면서 이루어졌다. 원경선 원장(96세)은 2시간이 넘는 인터뷰동안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했지만 약해진 청력 때문에 따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경기도 부천에서 콩 반가마로는 콩나물을, 콩 8가마로는 두부를 만들면서 시작하였는데 1976년 양주로 풀무원농장을 옮기면서 본격적인 생산도 이루어졌다. 여기서 생산한 농산물을 가지고 1981년 5월에는 서울의 압구정동에 '풀무원 농장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 이라는 작은 채소가게를 열게 되었고, 가게를 연지 3년만인 1984년 (주)풀무원식품이 설립되었다.
한국 유기농의 대부 우리 식품사에 있어‘농약주지 않는 콩나물’과‘포장두부’는 한 획을 긋는 획기적인 일로 여겨지는데, 또 한 가지 원경선 원장이 선도하고 실천한 것은 유기농을 시작한 일이었다.1975년 8월 원경선 원장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일본인 고다니 준이치를 만나 일본 유기농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일본 유기농의 대부이자, 애농회의 대표였던 고다니 준이치의 초청 으로 일본을 다녀온 원 원장은‘정신적인 쇼크’를 받게 된다. 원경선 원장은1975년과 1976년, 일본 애농회의 고다니 준이 치를 초청하였다. 고다니 준이치 대표는 ’일본이 한국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며 개인적으로 깊이 사죄함과 동시에“한국 농업은 농약 주는 일본농사를 따라하지 마라, 유기농업이 생명농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 애농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원경선 원장은 바른 농사를 짓는 ‘정농회’를 설립하고 유기농업을 실행하였다. 원경선 원장은 일본에서는 유기농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유기농이 정책지원과 함께‘단칼’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최근엔 오히려 우리나라의 유기농업이 일본을 앞서가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원경선 원장은 본격적으로 유기농 사업을 하는 한편, <기아대책 한국지부>와 <환경정의시민연대>도 연이어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기농업의 시작 이 곧 환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는 경실련의 추천으로 유엔(UNEP)에서 세계 글로벌 리더 500명에게 주는‘글로벌 환경상’을 수상하였다. 풀 무원이란 기업명은‘풀무질’에서 유래한다. 쇳덩이가 풀무질로 쓸모있게 되듯이 1914년 평양 출생인 원경선 원장은 인생의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생명을 풀무질’해온 진정한 이 시대의‘초인’으로 생각된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 생의 거목을 알게 되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출처: 한국콩연구회 소식 제 282호(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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